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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YOUNG SOO 김영수
ARTIST REVIEW /
from native pine trees
To a dimension that encompasses the moon of emptiness...
Shim Sang-yong (Doctor of Art History, Professor of Dongduk Women's University)
Pine trees in Youngsoo Kim are not the kind that soared straight into the sky. Brave spirit, dignity, and noble purity are the monks who are not suitable for his pine trees. In a sense they may be much less aesthetic, perhaps because they have a much more commonplace presence.
Look at the bodies that are almost one by one, bent and twisted! The skin is covered with dead skin cells that are not very delicate. The skyward spirit is not very attractive.
The pine trees in Youngsoo Kim are not of any particular breed. They are native species that are easily found anywhere on the peninsula, at the mouth of any neighborhood.
The randomly stretched branches resemble our lives. As a metaphor for life (indirect allusion), they move forward especially in closer solidarity with Korea's long-standing emotions by meeting with the moon this time.
Unlike the wriggling of pine trees and the elaborate depiction of its sharply pointed leaves, the moon exists as a huge margin, a large void, expressed only by outline.
While the described pine tree tells the story of time with its whole body and confides in the discourse of memory, the moon remains silent, not related to any narrative trace.
If the pine trees are glossy prose (free) full of existential and everyday nuances, the moon can be compared to a kind of symbolic poem recorded in the language of omission.
It seems reasonable to confirm two meanings from this spectrum and the aesthetics of width.
The first is that this moves the Youngsoo Kim's painting space to a more 'acceptive' level in communication. As a series of images of photorealism tendencies have proven since the 1970s, excessive descriptions of facts are likely to bolt the invitation space and discard the possibility of dialogue. This is why the autistic nature of fully self-fulfilling depictions becomes a much less dominant factor due to the coexistence of densely depicted pine trees and the moon treated with emptiness and absence.
The second meaning allowed by the spectrum of fact and abstraction is the fact that his painting space has become involved in a much wider world. As a result, Youngsoo Kim's painting has an encouraging beginning to dispel the misunderstanding of previous materialism or a kind of genreization.
It also confirms that Youngsoo Kim's paintings are moving toward a more open dimension, peeling off the hard dead skin of the traditionalism (around) and materialism. The main discourse of this world goes beyond the visual analysis of objects and objects to embrace the correlation between pine trees and the moon, that is, the internal and abstract pursuit resulting from the relationship between objects and objects.
Is Youngsoo Kim's painting now trying to slowly move to the discourse of heaven and imagination, instead of stopping at the narrative of the earth and the earth? If so, his painting may be acquiring a dimension of insight to unite reality and beyond reality.
Youngsoo Kim is moving toward a different level of painting and painting from yesterday, taking advantage of his excellent description and his unique lyricism as a milestone. Perhaps the place where he arrives is certainly not such a world where one, or a few objects, are still trapped in his own world and cannot reach one profound convergence. This is why he wants the journey he is walking on to last. This is because I think his future achievement will confirm the deep solidarity that exists among the factors of the world.
작품평론 /
자생종 소나무로부터
‘비움’의 달까지 어우르는 어떤 차원으로…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대교수)
김영수의 소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 곧게 치솟은 종류의 것이 아니다. 씩씩한 기상과, 품격, 고상한 순결 등은 그의 소나무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수사들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훨씬 덜 미적일 수도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것들이 훨씬 더 서민적인 풍채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하나같이 제각각으로 굽고 뒤틀리고 휘어져 있는 그것들의 몸뚱이들을 보시라! 피부는 그다지 섬세하다곤 할 수 없는 각질을 뒤집어쓰고 있다. 하늘을 향하는 기상도 그다지 볼품 있는 것이라곤 할 수 없다.
김영수의 소나무들은 조금도 특별한 품종의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반도의 어느 곳, 어느 동네 어귀에서건 쉽게 발견되는 자생종이다.
임의로 뻗은 굴곡진 가지들은 그만큼 우리들의 삶을 닮아있다. 삶의 메타포로(간접적 암시)서 그것들은 이번에는 달(月)과 만남으로써 특별히 한국의 오랜 정서와 더욱 긴밀하게 연대된 것으로 나아간다.
소나무의 꿈틀거림과 그 예민하게 뾰족한 잎새들을 그릴 때의 치밀한 묘사와는 달리, 달은 단지 윤곽으로만 피력되는 거대한 여백, 커다란 공허로 존재한다.
묘사된 소나무가 온 몸으로 시간의 이야기를 전하고 기억의 담론을 털어놓는 동안, 달은 어떤 서술적 자취와도 연관되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한다.
소나무들이 실존과 일상의 뉘앙스를 가득 머금은 유려한 산문체(자유로운)라면, 달은 생략의 언어로 기록해 나간 일종의 상징시에 비유될 수 있다.
이 스팩트럼, 폭의 미학으로부터 두 가지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첫째는 이로 인해 김영수의 회화공간이 소통에 있어 더 ‘수용적’인 차원으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1970년대 이후 일련의 포토 리얼리즘(photo realism)적 경향의 이미지들이 입증해 왔듯, 과도한 사실 묘사는 자칫 초대의 공간에 빗장을 지르고, 대화의 가능성을 폐기하는 쪽으로 작용할 개연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치밀하게 묘사된 소나무와 비움과 부재로 처리된 달의 공존으로 인해 전적으로 자기충족적인 묘사의 자폐성이 훨씬 덜 지배적인 요인이 되는 까닭이다.
사실과 추상의 스팩트럼이 허용하는 두 번 째 의미는 그의 회화공간이 훨씬 더 넓은 세계에 관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김영수의 회화는 이전의 소재주의, 또는 일종의 장르화라는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는 하나의 고무적인 단초를 가지게 된 것이다.
김영수의 회화가 단지 보다 전통을 환기시키는 의고주의(둘레를 둘러 싼)와 소재주의의 딱딱한 각질을 스스로 벗겨내면서, 더 열린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세계의 주된 담론은 대상과 사물의 시각적 분석을 넘어, 소나무와 달의 상관성, 곧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내적, 추상적 추구까지를 포용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김영수의 회화는 이제 땅과 대지의 설화로 그치는 대신, 하늘과 상상의 담화로까지 서서히 발을 옮기려 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의 회화는 현실과 현실 너머를 하나로 매듭지으려는, 어떤 통찰의 차원을 획득해 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김영수는 탁월한 묘사력과 자신의 고유한 서정성을 이정표 삼아 어제와는 다른 회화와 그리기의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마도 그가 도착하는 그곳은 한 개, 또는 몇 개의 사물들이 여전히 자신의 세계에만 갇힌 채 하나의 심오한 융합에 도달하지 못하는 그런 세계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그가 지금 걷고 있는 여정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이유가 이러하다. 그의 앞날의 성취가 세계의 요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연대성을 확인시켜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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